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르틴 하이데거 (문단 편집) === 강의 금지 처분 === 1945년, 2차대전이 끝나자 프랑스 군정 당국은 나치 정화작업에 착수한다. 하이데거는 바로 이 정화위원회에 출두하여 심의를 받아야 했다. 하이데거는 자신을 변호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그가 국가사회주의를 지지한 것은 변화된 민족 공동체 감정을 토대로 해서 사회적 대립들의 화해를 실현할 수 있으리라 희망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공산주의의 세력 확장이 저지되어야만 했다. 총장직 또한 "정말이지 마지못해" 맡은 것이었고 "더 좋지 못한 상황"을 막겠다는 목적으로 한 해만 직책을 유지한 것이다. 더군다나 자신은 1930년대 중반 이후로 공개적으로 국가사회주의자들의 권력 사유를 비판했다. 당은 이에 상응하는 반응을 보여 자신의 강의에 밀정을 보내는가 하면 저술 출판을 방해하기도 했다. 1945년 8월 정화위원회는 하이데거에게 상당히 관대한 판정을 내린다. 판정에 따르면, "하이데거는 처음에 국가사회주의 혁명에 봉사하여 교양 있는 독일인들의 시각에서 보면 이 혁명을 정당화했으며, 그 결과 정치적 변혁의 와중에서 독일 학문의 자주성을 위태롭게 했지만, 1934년 이후로는 더 이상 나치가 아니었다." 정화위원회는 이런 권고안을 제시했다. "하이데거는 조기 퇴직해야 할 뿐 해직될 필요는 없다. 하이데거는 명예교수로서의 자격은 유지하되, 대학 내 일체 조직에 참여할 수 없다."[* 뤼디거 자프란스키 『하이데거, 독일의 철학 거장과 그의 시대』 박민수 옮김, 북캠퍼스, 2017, p.563] 그러나 이러한 판결에 대해서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일부 교수들이 강력하게 반발한다. 이들은 하이데거가 독일대학을 나치화하는 데 앞장섰으면서도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어떠한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변명으로 일관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 결과 하이데거는 12월에 다시 정화위원회에 끌려가 조사를 받게 되었고 조사과정에서 탈진 상태로 쓰러져 요양소[* 바덴바일러 근교 하우스바덴 요양소.]에 옮겨졌다.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인지한 하이데거는 야스퍼스에게서 평가서를 받아 보자는 제안을 한다. 야스퍼스의 평가서가 있으면 이 모든 상황을 모면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 것이다. 야스퍼스는 부인이 유대인이었던 관계로 나치 치하에서 박해를 받았고 독일 패전 후에는 나치에 저항한 대표적인 철학자로 국민적인 추앙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야스퍼스가 작성한 평가서는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왔다. 야스퍼스는 마침 그해 겨울학기에 죄의 문제를 재검토할 필요성에 관해 강의를 한 참이었다. 만약 하이데거가 이 강의에 관해 알았더라면, 야스퍼스에게 평가서를 요청할 생각은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평가서에서 야스퍼스는 일부 교수들에 대한 하이데거의 고발행각을 폭로했다. 그리고 1920년대에 하이데거는 반유대주의자가 아니었지만, "어떤 맥락에서는" 거기에 휩쓸렸던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무엇보다도 야스퍼스는 하이데거의 사유가 강압적이고 의사소통을 거부하며 역사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거부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전후 독일사회가 요구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하이데거의 철학은 나치 치하에서 무너진 책임 윤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데 방해가 되며, 아직 독자적인 판단력을 결여하고 있는 젊은이들에게는 유해한 철학이라는 것이다. 결국, 프랑스 군정 당국은 야스퍼스의 평가서에 근거해 1946년 말 하이데거의 강의를 심사 결과가 확실히 나올 때까지 금지시키고 그 동안 교수직을 박탈한다.[* 이때 연금 수령까지 받지 못하도록 했으나 이 결정은 1947년 5월 다시 취소된다.] 아이러니한 점은, 강의가 금지되었음에도 프랑스 철학계에서 하이데거의 영향력은 점점 커져만 갔다는 사실이다. 하이데거의 기초존재론에 많은 영향을 받은 [[장폴 사르트르]]의 [[실존주의]]가 프랑스를 강타하고 있었던 것이 큰 역할을 했다. 게다가 사르트르는 자신의 사상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하이데거를 직접 만나보고 싶어했고, 하이데거도 만남을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사르트르의 글을 읽고 난 뒤 사르트르의 사상이 현재 자신의 사상과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사르트르는 자신의 초기 사상만 이해하고 있었을 뿐, 전회 이후에 바뀌어 버린 자신의 사상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사르트르와 하이데거는 1952년에야 프라이부르크에서 개인적으로 만난다. (뤼디거 자프란스키 『하이데거, 독일의 철학 거장과 그의 시대』 박민수 옮김, 북캠퍼스, 2017, p.581)]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를 비판하고 있는 「휴머니즘에 관하여(1946)」에서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강조했던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는 현존재'라는 실존(Existenz)의 개념에 집중하기보다는, 『존재와 시간』 이후 그 책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수행했던 철학적 개념에 '탈-존(Ek-sistenz)'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 개념에 초점을 맞춘다. 실존은 기껏해야 결단성으로 이끄는 것이었던 반면, 탈-존은 전혀 다른 종류의 체험에 대해서 열려 있음을 뜻한다. 즉, 전회 이전에 하이데거는 실존을 실현하려는 현존재 내부에 머물러 있었다면, 전회된 접근 방식에서 그는 현존재에게 말을 건네고 요구를 하는 존재를 향해서 말 그대로 '나가려(hinaus)' 한다. 그리하여 "인간이 존재의 빛트임(Lichtung) 안에 서 있음"을 탈-존이라 한다.[* 이는 '생생한 고유화'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유에서 행동은 반대로 나타난다. 실존적 사유에서는 개별적 현존재의 내부로부터 기투된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한 능동적 행동이 요구되었다면, 탈-존적 사유에서는 자신의 바깥으로 나온 현존재가 존재의 말을 듣기 위해서 방임하고 감내하는 행동의 수동적 양식이 강조된다. 현존재의 "내던져짐" 대신 현존재의 "역운"이 부각되며, 자신의 사안들에 대한 현존재의 "배려" 대신 그에게 부과되고 맡겨지는 "지켜냄"이 강조된다. 세계로 "빠져 있음" 대신 세계의 "쇄도함"이 등장한다. 그리고 "기투"에서 스스로를 "던지는" 것은, 현존재가 아니라 바로 존재 자체의 일이 된다. 즉, 전회 이전에는 행동을 촉구하는 철학이었다면, 전회 이후에는 '행동 없는 사유'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 결정적으로 달라진 점이다. 사실관계나 논리만 따지는 어떤 현실적인 사람이 교향곡을 듣고 나서 깊은 감동에 사로잡힌 옆 사람에게 "저게 우리에게 뭘 증명하는 거죠?" 라고 물었을 때, 이런 물음을 어리석어 보이게 만드는 그런 사유가 있는가? 하이데거는 자신의 사유가 그런 종류의 사유라고 확신한다. 사유란, 존재가 그 폐쇄 상태에서 빼내어져 언어의 열린 공간에서 '주어져 있음(Es gibt)'을 말한다. 즉 그것은 존재를 '언어로-데려가기(Zur-Sprache-Bringen)'다. 그러나 하이데거에 따르면 존재는 규정되지 않는 무엇이므로, 열린 공간에 주어지는 것으로부터 우리가 현실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런 사유는 과학처럼 어떤 지식에 이르지 못하고, 유용한 삶의 지혜를 가져다주지도 못하며, 세계의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고, 행동할 수 있는 힘을 직접적으로 제공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런 사유를 통해 세계와의 관계는 전체적으로 달라진다. '처해 있음'이 달라지고, 세계로 기투되는 시선이 달라진다. 그것을 고유하게 사유한다는 것은 존재에 그 존엄을 되돌려 줌을 뜻한다. 그것은 존재의 고유한 가능성을 언어로 드러내어 존재를 존재케 하는 일이다. 하이데거가 생각하기에 진정한 인간다움이란 그런 사유를 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그가 사르트르의 실천적 휴머니즘에 대해 반발하는 것도 그 휴머니즘이 이러한 "인간의 인간다움[* 앞서 말한 '행동 없는 사유'를 가리킨다.]을 충분히 높게 평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제 하이데거는 이 사유를 음미하는 일로 남아 있는 세월을 보낼 것이다. 그의 사유는 누군가를 존재케 하는 그 무엇을 존재케 하는 일에 매진할 것이다. 1949년 3월, 하이데거의 탈나치화 심의는 우여곡절 끝에 "부역자이지만 재판은 면함"이라는 비교적 가벼운 판정[* 5단계 중, 뒤에서 2번째 판정. '수동적 동조자'에 해당한다.]으로 종결되었다. 2달 후,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는 그가 다시 강의를 시작할 수 있게끔 처분을 논의하는 협의가 시작되었다. 투표 결과 찬성표가 간신히 과반을 넘기자 대학 평의회는 하이데거를 명예교수직에 복권시키고 주 정부에 강의 금지 명령도 취소해 줄 것을 제안했다. 정부가 결론을 내리기까지는 다소 긴 시간이 걸렸다. 1951/52년 겨울이 되어서야 하이데거는 종전 후 처음으로 강의를 시작할 수 있었다.[* 뤼디거 자프란스키 『하이데거, 독일의 철학 거장과 그의 시대』 박민수 옮김, 북캠퍼스, 2017, p.619]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